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흄 (문단 편집) == 생애 ==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11년 4월 26일, 변호사인 조피프 홈과 그의 아내 캐서린 팔코너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흄은 [[에든버러]]에서 동남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천사이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곳에서 흄은 초등 교육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영재였던 그는 12살의 나이에[*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 시대에는 12살에도 대학교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최근에는 흄이 천재 정도는 아니고 조기교육을 받은 영재 정도였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 고전, 논리학, 형이상학, 뉴턴의 자연철학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2년 간의 대학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집에서 공부하면서 문필가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신경쇠약으로 침체기에 빠지기도 하고 설탕 상인 밑에서 일하기도 하던 중, 24살이 되던 해에 문필가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목적지는 시골 마을 라플레슈였다. 이곳에는 [[데카르트]]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예수회대학이 있었다. 흄은 비록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학문적으로 비옥한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줄여서 《인성론》이라고 한다.]의 대부분을 집필했다. 흄은 이 책에서 경험과 관찰에 토대를 둔 새로운 인간학을 세우고자 했다. 이후 그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다시 영국 런던으로 간다. 그의 첫 책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불과 20대에 쓴, "그 자체로도, 또 사상사에 끼친 영향으로도 역대 최고의 철학서"라 꼽히는 저서이지만, 당시 런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무신론자라는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까지 찍혔다. 이에 크게 실망한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가 "인쇄기에서 이미 사산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낙심했다. 게다가 흄은 이 책 때문에 한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를 받아 교수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애넌데일 후작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기도 하고,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제안으로 프랑스 원정길에 비서로 동행하기도 하는 등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결국 흄은 에던버러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변호사협회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다. 흄은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를 8년 간에 걸쳐 6권의 전집으로 출간했다. 그는 이 방대한 작업으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저술가", "스코틀랜드의 [[타키투스]]", "그 어떤 언어로 쓰인 책 중에서도 단연 최고" 등의 극찬을 받았다. 책의 인기는 어마무시해서 수십년 동안 영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역사서로 군림했다. 이 책의 성공으로 흄은 돈과 명예를 얻었다. 1763년 흄은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는 허트포드 경을 따라 [[파리(프랑스)|파리]]로 갔다. [[프랑스]]에도 흄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흄이 프랑스로 온다고 하자 파리 사교계는 그를 크게 환대했다. 그는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또 다른 현장이었던 파리의 살롱을 드나들며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 [[몽테스키외]] 등과 사귀었다. 한편 종교적 이유로 곤경에 처해 있던 [[장 자크 루소]]와도 이때 처음 만났는데, 한 때 비슷한 처지였던 흄은 이를 이해하고 그를 영국으로 초대하여 은신처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소는 흄이 자신을 중상모략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루소는 결국 흄에게 절교 선언을 한다. 이후 흄은 2년간 국무차관이 되어 공무를 수행했다. 말년에 흄은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에든버러로 돌아왔다. 그 동안 명예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많은 친구들과 사교의 즐거움을 누렸다. 상당한 식도락가이기도 했던 그는 요리에 진심이었다. 심지어 손님에게 요리 접대를 하기 위해 에든버러 신시가지에 새 집을 지었다. 하지만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대장과 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정확한 병명은 모르지만 혈변 등의 증상으로 보아 대장암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항상 긍정적으로 살았던 그는 임종을 앞둔 상태에서도 놀라울 만큼 차분하면서 쾌활함을 유지했다. 1776년 4월에 짧은 자서전 《나의 생애》를 저술하고 8월에는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지었는데 여기엔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조카에게 자신이 죽고 난 후 출간해 달라고 부탁한다. 1776년 8월 25일,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에든버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올드 칼튼 묘지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